수차의이용

수차의이용

수차(水車)는 한발에 대비한 양수기로서 관개 수리 사업에 쓰이는 데 수차 이용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1년에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수차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용골차와 통차이고, 16세기 이후에는 용미차(Archimedes screw)와 옥형차 같은 서구식 수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고려말 이래로 수차라면 일반적으로 용골차, 즉 번차로 우리말로 '물자애(위)'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대(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
세종 11년(1429년)에 일본으로부터 통차가 보급되었는데 종래의 족답식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라고 불리었고, 이때부터 종래의 수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여 당수차라 하고, 통차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하여 왜수차라 했다.

성종 때부터 연산군 2년(1496년)에는 최부가 중국에서 보고 온 수전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연산군 8년(1502년)에는 전익경이 정교하고 능률적인 수차를 만들었다고 하며, 명종 15년(1546년)에도 중국의 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들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숙종 때에도 물리학자 이민철이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숙종 9년(1683년)에 보급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 서양계 수차인 용미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이와 같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차는 농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가난 때문에 새로운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나라의 지세와 자연조건으로 볼 때 대체로 천수로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상례이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수차를 돌릴 만한 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수차의 보급이 어려웠던 다른 문제들 중에는 자재의 문제, 즉 수차 제작에 쓰일 목재가 우리 나라에는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질이나 우량의 면에서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은 수전농업에 있어서 보(洑)나 제언(堤堰)을 발전시켰고, 벼 재배는 그러한 시설로 족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수차의 제작은 절실한 문제로 요청될 수 없었고 더욱이 벼 재배는 부종법이 주여서 파종기의 물 문제는 이로써 어느 정도 조정할 수가 있었다.

그런 대로 가장 잘 보급된 것이 답차라는,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였다. 그것은 간편하여 제작비가 적게 들고 한 사람이 밟아 돌리는 데도 두레나 용두레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답차는 지금도 삼남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차이며, 염전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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