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가면 물챙이여울, 물챙이방축, 물챙이다리 등의 물챙이란 땅이름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윗마을에서 흘려 보낸 오물로 아랫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경계목에 냇물로 가로지르는 물챙이를 친다. 자잘한 꼬챙이를 촘촘히 엮어 물만 흐르고 오물은 그것에 걸리게끔 한 수질 오염방지의 전통적 장치였다.
그것에 걸리는 나뭇가지 등의 큰 쓰레기는 건져서 마른후에 태워버리거나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르면 쌓인 쓰레기는 걷어 내어 논밭의 거름으로 썼다. 우리조상들의 수질을 두고 마음쓰는 환경의식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물의 오염을 염려하는 터부도 다양했다. "냇물에 오줌을 누면 고추 끝이 부어 올라 감자고추가 된다." ,"사내가 해를 보고 오줌을 누거나 계집아이가 흐르는 물에 오줌을 누면 장가가고 시집가서 아기를 못낳는다." 고했다. 또 시집가는 딸에게 아기들 기저귀는 냇물에 가서 빨지 않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반드시 샘물을 퍼다가 빨고, 빨고난 물은 텃밭이나 두엄터에 버리게끔 했다. 배설물에 의한 오염에 이토록 세심한 우리 조상들이었다.
물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쓰는 물의 양부터 줄여 나가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물을 아끼면 부엌일을 주관하는 "조왕신"이 복을 주신다고 믿으면서 돈을 전혀 안 들이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던 샘물까지 아껴 쓰도록 가르쳤다.
물을 넣은 항아리(壺)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그것을 받는 그릇에 시각을 새겨 넣은 잣대(箭)를 띄워 그 잣대가 떠오르는 것으로써 시간을 알게 되어 있다. 맑은 날과 낮에만 쓸 수 있고 흐린 날과 밤에는 쓸모 없는 해시계보다 유용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성덕왕(宣德王) 17년718에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여, 박사(博士)6인ㆍ사(史) )1인의 관원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앞서 554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천문학자(天文博士)들의 지도를 받은 일본에서 누각이 제작되고(671), 누각박사ㆍ역박사 등이 제도화된 점으로 미루어, 백제에서는 이미 6세기에 누각이 제작되고, 누각박사의 관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누각은 사료(史料)가 없어 상세하지는 않으나, 계호정(戒壺正)이나 장루(掌漏)같은 누각담당 관리가 있었고, 서운관(書雲觀)ㆍ태복감(太卜監)ㆍ사천대(司天臺)등의 기관에서 천문(天文)ㆍ역수(曆數)ㆍ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한 사실로 미루어 누각이 공인 시계였음을 알 수 있다.
자격루(自擊漏)라고 하는 이 자동시보 물시계는 경복궁 남쪽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그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루를 대체(代替)하고 새로운 표준시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자격루는 부정시제(不定時制)인 당시의 야루법(夜漏法)에 맞게 경점(更點)을 자동으로 시보하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었고, 그 기능은 귀신과 같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한다. 수수호(受水壺)의 길이가 11자 2치, 지름이 1자 8치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격루는 창설된 지 21년 만인 1455년(단종 3) 2월 사용이 중지되고 보루각도 폐지되었는데, 이는 장영실이 죽고 공동설계자인 김빈도 그해 10월에 운명할 정도로 고령이어서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자격루는 그후 14년 만인 1469년(예종 1) 복원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 창경궁으로 이전되었다.
그후, 새로운 자격루가 1536년(중종 31) 제조되었는데 그 구조는 장영실의 자격루와 같은 것이었고, 점수(點宿)를 스스로 칠 뿐 아니라 인경과 바라도 울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세종의 총애로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장영실은 세종을 위하여 천상시계(天象時計)며,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은 1438년(세종 20) 1월에 완성되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옥루는 수격식(水激式) 동력장치를 가진 일종의 자동 천상물시계라 할 수 있는데, 명종 초 경복궁 화재로 없어진 것을 1554년(명종 9)에 다시 만들었다.
그밖에 조선시대의 누각에는 의기(器)라는 일종의 물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에는 농가사시(農家四時)의 광경이 새겨 있어 계절에 따른 농사진행 상황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다. 또한, 1437년(세종 19) 6월에는 휴대용 물시계인 행루(行漏)가 여러 개 완성되어 함길도와 평안도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과 변경(邊境)의 각 군(郡)으로 보내졌다.
현재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누각은 중종 때 만든 자격루로,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에 따라 1일 96각(刻)으로 바뀌자 자격장치를 그대로 쓸 수 없어, 그것을 제거하고 누기(漏器)만으로 조선 말까지 누국(漏局)에서 사용하였다.